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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중세사 - china과 한국 - 고구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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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2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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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만주 지역이 일본과 러시아의 影響(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China에서 고구려사 연구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China 정부는 서부 지역과 동북 지방의 균형 개발을 추진하는 한편 China이 한족(漢族)뿐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함께 건설한 국가라는 ‘통일적(統一的) 다민족국가론(多民族國家論)’ ‘중화민족론(中華民族論)’을 부각시킴으로써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China의 최근 태도는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스스로를 ‘고려’ ‘구려(句麗)’라고 불렀고, China쪽 歷史(역사)서에도 ‘고려’가 고구려의 약칭 또는 이칭(易稱·쉽게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China인조차 두 나라를 연결시켜 생각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China 학자들은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는 250년이나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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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선진적인 동남쪽 연해(沿海) 지역과 낙후된 내륙 지역의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했고, 내륙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민족들의 위화감이 커져갔다. 게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소수 민족 연구가 금기시되는 바람에 고구려 歷史(역사) 연구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China에서 고구려사 연구는 1877년 광개토대왕비의 발견으로 스타트됐다. 이 시기 China의 歷史(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신라·백제와 함께 한국사에 포함시켜 ‘삼국시대(三國時代)’로 파악했고, 각급 학교 歷史(역사) 교과서 또한 이런 관점을 채택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고구려사는 China사와 한국사에 동시에 속한다”는 이른바 ‘일사양용(一史兩用)’론이 장멍산(姜孟山) 류쯔민(劉子敏) 등의 학자에 의해 대두하면서 이런 상황이 조금씩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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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0년대에 한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사는 China사의 일부”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부상한다. 이로부터 약 20년 동안 China 학자들 손에 의해 ‘호태왕비고증(好太王碑考證·1887년)’ ‘호태왕비석문(好太王碑釋文·1889년) ‘고구려영락대왕비가고(高句麗永樂大王碑歌考·1895년)’ 같은 책이 출간됐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China이 개혁·개방 이후 ‘국민적·영토적 통합’이 최대 당면 project로 대두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 윤 연구위원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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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와 유적 발굴이 갑자기 급증하기 스타트했으며, 2002년 China 사회과학원이 스타트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그 집대성이라는 것이다. 리뎬푸(李殿福) 쑨위량(孫玉良) 쑨진지(孫進己) 등은 고구려가 평양 천도 이후에도 민족 구성이나 정치 성격에 변함이 없었으며, 당시 영토 경계를 기준으로 보면 마지막까지 China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현재의 China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歷史(역사)는 China사라는 새 원칙이 채택됐다. 이들은 서기 427년 평양 천도(遷都)를 기준으로 만주 지역에 중심이 있던 그 이전은 China사, 한반도에 중심이 있던 그 이후는 한국사에 속한다고 본다.
REPORT 74(sv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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